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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 광인(豚カツ狂人)

느티21 2021. 7. 18. 22:46

우리 집에는 "돈까스 광인(豚カツ狂人)"이 산다.(한국어사전에는 돈가스가 맞지만, 어감 전달을 위하여 돈까스 광인으로 표기함). 돈가스야말로 3대 영양소(탄단지)를 갖춘 완벽한 음식이라나 뭐라나.

돈가스에 대한 특별한 호오가 없는 나는, 어릴 때 어머니 옆에서 (한국식) 돈가스를 만들던 기억을 바탕으로, 결혼 후 서너차례 돈가스용 돼지고기 등심을 사서,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린 뒤, 밀가루-계란-빵가루를 묻혀서 만들곤 했다. 그래 봤자 일 년에 한두 차례 정도. 돈까스 광인은 옆에서 보조를 하면서 이 레시피를 익힌 뒤, 몇 년 전에 내가 미국에 1년 남짓 나가 있는 동안, 홀로 돼지고기 서너 근을 사다가 잔뜩 만들어서 냉동고에 얼려놓고 튀겨먹었다는 무용담을 내게 자랑하곤 하였다.

돈까스 광인은, 몇 년 전 집에 에어프라이어를 들이고 나서는 더 이상 돈까스를 집에서 만들지 않는다. 내가 만들자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냉동 돈가스가 잘 나오는데 뭐하러 굳이 왜 수고를 하냐는 거다. 이후  C사의 고메 돈가스는 한동안 냉동실에 구비해놓고 있었는데, 이 양반의 돈가스 사랑은 대략 2017년 이후 더욱 심해졌다.

취직 후 지역에 출장을 가거나 하면, '고독한 미식가'의 이노가시라 고로상처럼 돈까스 식당을 찾아다닌다. 이따금 저녁 약속이 없고, 내가 저녁에 일정이 생겨서 홀로 저녁을 먹게 되면 성수동에 대단한 돈가스 맛집이 있다며 이곳 돈가스를 먹으러 간다는 타령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 분의 일터인 수원에서 성수동까지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출격하여 먹고선 신나게 돌아온다.

이 양반이 어제는 덥다고 휴가를 내고 쉬었는데... 저녁에 덥고 습해서 밥하기가 싫어서 외식을 결정.
동네에 유명하다는 돈까스 집에 갔다. 예전에 수요 미식회에 나왔다는 ㅎㅅ돈가스의 분점이다. 일전에 포장을 해온 적이 있는데, 포장을 하니 살짝 눅눅해지더라. 이 집 돈가스의 특징은, 단면을 보면 계란 물이 많이 들어갔다는 거.. 그래서 식당 안에서 먹으면 제대로 맛을 볼 수 있겠거니 해서 등심과 안심을 시켰는데, 사실상 부위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아 살짝 아쉬움을 느끼며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이후, 지도앱으로 동네 식당을 검색하던 돈가스 광인. 갑자기 정말 가볼 만한 돈가스 집이 지척에 있었는데, 그곳을 못 갔다며 매우 아쉬워한다. 리뷰를 보니 재료 소진으로 자주 일찍 문을 닫는 집이었다! 게다가 배달은 애초에 불가. 맛을 헤치기 때문이란다. 이런 자존심을 갖고 있는 식당이라면 가보고 싶었다. 

결정, 오늘 점심은 거기로 가자! 그래서, 이틀 연속 돈까스를 먹게 되었다.
오늘 간 집은 돈까스 광인이 추종하는 "돈가스를 쫓는 모험"이라는 블로거(https://blog.naver.com/stveiry)의 분류에 따르면, "일식 정파" 스타일. 무려 고기를 레어와 웰던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어제 그 집은 일식 사파에 가깝다나? 정파로 보기엔 튀김옷이 이상하다나. 아, 사파로 보는 결정적 근거는 깍두기가 곁들임 반찬으로 나온 것. ㅎ)

일본식 돈까스와 한국식 돈가스의 결정적인 구분 기준은
1. 칼을 쓰느냐, 아니냐(칼을 쓰면 한국식, 젓가락으로 먹을 수 있으면 일본식),
2. 두번째로 사파와 정파를 나누는 기준이 있는데.. 우선 소스를 부먹 하느냐, 찍먹 하느냐란다. 일본식 정파는 찍먹, 부먹은 사파. 곁들임으로 깍두기가 나와도 사파.
한국식은 부먹이 정파. 찍먹이 사파. 즉 한국식 정파는, 돈까스 위에 소스가 부어져 있고 수프와 깍두기 내지 김치가 곁들여져 나오고, 포크와 나이프, 젓가락 동반. 그니까 성북동 기사식당 돈가스 스타일이 한국식 정파인 것.


그런데, 정말 이 집 돈까스는 젓가락으로 찍먹 하는 스타일로 소금과 고추냉이를 곁들여 나왔는데, 등심 부위는 기름기가 적당히 있으면서 아주 촉촉하고, 안심도 퍽퍽하지 않고 촉촉, 맛나더라는 것이다.

돈까스광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한 달에 한 번은 이 집에 가겠다고 결심 또 결심.. 왠지 다음 주에도 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만서도.. 여하튼, 내부는 깔끔한 일본식 바 스타일이었다. 아슬아슬했던 것이 우리 이후에 세 팀 정도 받고 고기가 동나버려서 주문 마감 사태가 발생. 저녁에 왔으면 허탕 칠뻔했다. ㅎㅎ 
이제 근본 없는 식당들로 가득찬 신도시에서 외식할 때, 덜 고민할 듯.. ㅎ

*찾아보니 오늘 간 돈까스식당은 경기도의 신도시를 주로 공략하고 있는 듯하다. 무수한 분점이 모두 신도시에 위치하고 서울엔 홍대 한 곳뿐이다. 구매력과 음식 포용력이 넓은 30-40대를 주 타깃으로 삼는 듯하다. 어디까지 확장해나갈지  흥미롭다..

*후기.. 1주일이 다시 안돼서, 폭염을 뚫고 이 식당을 재방문했다. 프리미엄 등심과 안심으로 구성된 2인 세트를 맛보기 위해서..  광인이 재택근무를 하던 날 2시 가까이 느지막이 갔다가, 2인 세트는 이미 팔려서 실패. 

이후 여름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 광인과 금요일 점심에 2차 시도. 이날은 아예 문을 여는 11시 정각에 맞춰 갔다. 정확히 10분 만에 좌석이 모두 찼고, 착석 후 15분 뒤쯤 2인 세트가 서빙되었다. 카레를 담은 작은 접시도 함께 서빙. 

선홍빛 돼지 등심과 안심의 조화! 게다가 함께 찍어먹는 트러플 소금이 풍미를 돋운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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